2022. 10. 2. 16:39ㆍSTUDY
<참 스승, 인물로 보는 한국 기독교 교육사상> - 윤동주
윤동주 시인은 타인의 괴로움을 외면하지 않고 그의 고통을 대신 짐지는 순간 개인은 행복한 하나의 주체가 된다는 것을 알고, 그 길을 선택하였다. 그는 만주에서 태어나 자라고 일본에서 옥사하기 까지, 중국 명동 마을과 용정, 평양 숭실중학교, 경성 연희전문을 거치는 조선인 디아스포라로 살았다. 윤동주 시인은 윤봉길 의사가 의거를 일으킨 시기에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 <초 한 대>의 첫 시를 남긴다. 이 시들은 그가 살아가고자 하는 삶을 엿볼 수 있는 시이다. 그의 시 속에서는 예수님을 비유하는 “염소의 갈비뼈”라던가 자신이 이제까지 살아왔던 삶을 비유하는 “내 방”등의 표현 등 깊은 의미를 담은 표현들이 있다.
윤동주는 은진중학교 4학년에 다니다가 숭실중학교로 편입 시험을 보았는데, 3학년으로 학년을 낮추어 들어가게 되는 좌절을 맛보게 되었다. 친척형 송몽규의 작가 데뷔와,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던 문익환의 합격은 윤동주를 더욱 문학 창작에 몰두하게 했던 이유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가고싶어서 온 조국의 평양 숭실 중학교에서 그가 만난 것은 신사참배의 강요였다. 이 사건을 통해 성경과 성품에 맞게 동시를 썼던 윤동주는 급격히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쓰게 된다.
윤동주의 시들을 보면 그의 신앙, 신념, 그가 처했던 상황들에 대해 알 수 있다. <이적>에서는 마태복음 14장에서 갈릴리 호수 위를 걷고자 했던 베드로의 이야기에 대한 그의 생각을 볼 수 있다. 그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것이 아닌, 그 사건을 만난 호숫가로, 풍랑 이는 호숫가로 부름 받은 것이 이적이라고 이야기 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일상 자체가 이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가 일상속에서 느끼는 일반 계시를 이적으로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시 <팔복>에서는 산상수훈을 엿볼 수 있다. 그가 이 시를 썼을 때, 세계는 전쟁속에, 그의 조국은 일본의 발 아래 식민지가 되어 말과 이름을 다 뺏기고 신사 참배를 해야했던 슬픔 속에 살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팔복 안의 심령이 가난한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 긍휼이 여기는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자,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자를 통틀어 슬퍼하는 자로 표현하며 그 현실을 목도한다. 그리고 시의 마지막에서 “영원히 슬플것이오”는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기 쉽지 않았을 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시간이 지나며 슬픔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포월의 신앙을 깨닫게 된다.
그가 4학년때 썼던 시 <무서운 시간>에서는 희망찬 미래를 꿈꾸지 못하고 겨울나무의 가랑잎처럼 붙어 있어야 하는 자신의 불안한 운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시 마지막 부분에서 “나를 부르지 마오”라는 표현은 “나의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하였던 예수님의 고백과 같은 결단을 표현한 역설적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그는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하고 이야기 한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예수님을 따라, 타인의 고통을 짊어지고 가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흔히 공부 잘하고 성공하는 것이 다른 이를 도울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윤동주 시인의 글을 보면, 진심이 담긴 글을 가지고, 마음을 울리는 말로 짜인 시 하나를 가지고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살릴 수도 있다. 결론은, 교사가 잘 가르쳐서 학생이 공부 잘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진심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 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중요하다. 그 진심이 글을 통해, 예술을 통해, 행동을 통해 나타날 때 예수님처럼, 윤동주 시인처럼,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참 스승, 인물로 보는 한국 기독교 교육사상> - 전영창
전영창 선생은 민족과 민주 사회를 위한 참 교육 운동가로, 경향신문에서 수여한 “국민이 주는 희망의 상”도 수여할 정도였다. 그의 교육에 매료된 사람들은 도산이나 남강 선생과 비교해도 조금도 모자라지 않는다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그는 우리나라 교육계는 물론이요 기독교계에서도 아웃사이더였다. 큰 교단에 소속된 교회 목사로서도 아니었고, 정부 교육정책의 모범 사례도 아니었고, 학교교육자로만 간주되어 소외 되었다. 그가 충분히 평가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 독립의 일환으로 교회에 나갔던 할아버지,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가 옥살이를 했던 아버지의 영향만으로도 그의 어떤 애국심을 물려받았는지를 이야기 할 수 있다. 그의 자발적 애국 활동은 일관성 있게 표현되며 기독교적 신앙 행위로 발현 되었다. 그는 일제의 통제를 피해 신흥 학교에 다녔는데, 5학년때 신사 참배 행사에 가던 중 린턴 교장에게 동원 허락에 항의 하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일본 유학 시절 우치무라 간조가 한 강연 중 “정치적으로 독립을 잃은 너희의 조국을 성경으로써 구하라”는 말에 감명을 받아 조국을 구하기 위해 성경을 가르치는 목자가 되기로 결단했다. 그리고 제 2차 세계 대전때에는 사상 불온과 신사참배 거절을 빌미로 5년의 옥고를 겪으며 정신적 성장을 겪었다. 6.25전쟁이 발발 했을 때에는 나라가 망하는데 학위가 무슨 소용이냐며 미국 유학 중에서도 안전과 학위,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귀국을 선택했다. 다행히 웨스턴 신학대학원에서는 졸업 시험 면제와 졸업장 미리 수여를 해 주었다. 그는 귀국 후 부산에서 피난민 구제 복지사업, 복음병원 보건 사업등을 하고, 전쟁 후 콘콜디아 신학대학원에서 다음 단계의 신학 학위 공부를 마쳤다. 귀국 후 한남대의 교수 및 부학장 제의를 거절하고, 어려운 조건의 새로운 일을 하기에 힘썼다. 이 선택은 예수님처럼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사회적 약자 집단의 동포들에게로 가야 한다는 책무감에서 나온 선택이었다. 그는 애국하는 인간을 양성하는 목표를 가지고, 그 일에는 교회보다 학교가 더 적합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교회대신 학교의 목자가 되었다.
그는 고난을 극복하기 위한 힘이 기독교 신앙에 있다고 보았으며, 그 스스로가 고난을 극복하고 뜻을 이룬 모범 사례가 되었다. 그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신앙으로 무장하여 가난과 고난을 극복했던 사례들을 제시하며 충분히 가능하다고 호소하였다. 또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미래를 향한 꿈이 없는 개인과 민족은 망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사람을 만들자는 교육 이념을 가지고, 예배시간과 훈화 시간을 통해 이를 달성하고자 했다. 이처럼 학생들에게 감화력을 주었으나, 실수도 하고, 다혈질에 신경이 예민함을 보였던 것처럼 완벽한 모습만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정의로운 인간, 교양과 실력을 갖춘 글로벌 지식인, 그리고 사회와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인간을 양육하기 위해 힘썼으며, 그 스스로도 이 특성대로 조응하는 모범이 되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직업 선택의 십계를 만들어 제시하기도 했다. 하나님의 목자였던 그는,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묻히게 되었다.
삶을 살아가다보면 예수님 닮은 교사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버려야 할 것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내가 노력해서 이룬 것들, 특히 이제 완성의 단계에 와 있는 것들을 버리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것들도 많을 것이다. 전영창 선생처럼, 그것이 학위이던, 목숨을 거는 안전이던, 포기할 수 있을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내가 가진 모든 것, 나의 목숨까지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을 때 내가 열지 못했던 마음들이 열리게 되고, 내가 전하고자 하는 것이 듣는 사람의 마음에도 닿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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