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2. 15:38ㆍSTUDY
<참 스승, 인물로 보는 한국 기독교 교육사상> - 김용기
일가 김용기 장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흙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삼애(三愛)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사상과 삶, 가정은 한국 사회가 닮아가야 할 모델이 되었다. 그는 사상적인 면에서 개인의 인생관부터 우주의 생성 과정까지 탐구하고 사유하는 사상가였고, 믿고 가르치는 바를 먼저 삶으로 실천하였다. 부모님으로부터 기독교신앙을 물려받고,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농사를 지으며 모든 이치를 깨달았다.
1930년대 초 당시 우리나라는 80퍼센트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민족 발전을 위해서는 농촌과 농민으로부터 그 원동력이 나와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한 손에 성경을 또 다른 손엔 호미를”이란 표어 아래 봉안에서 이상촌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의 이상촌운동에 모델이 된 것은 덴마크였다. 전쟁 패전국으로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웠을 때 덴마크 정신적 지도자인 그룬트비히는 국민의 의식을 새로이 하는데 힘을 썼고, 이것이 일가 선생에게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 그는 이미 발전된 곳이 아닌 황무지를 택하여 근면 성실의 자세로 옥토로 바꾸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가난한 농부들에게 현실적으로 유용한 농업 지식과 기술, 삶의 의미와 개척 정신의 용기를 불어넣어 농업에 희망을 갖게 했다. 이러한 개척 정신은 가나안 농군학교의 근본 모티브와 핵심 내용이 되었다. 올바른 정신과 가치관을 형성하고 경제적으로 잘 사는 복지사회를 실현하는 것이 그의 궁극적인 목표였지만, 그 시작이 자신과 가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평범한 삶 속에 진리가 있다” 주장하였고, 이들을 일평생 철저하게 지켰다. 그는 사람이 먼저 변해야 사회가 변하기 때문에, 정신과 인성, 그리고 도덕의 변화를 강조한다. 그를 위해 자신과 가정을 변화의 모델로 보여주고자 했으며, 그 가정을 기반으로 가나안농군학교가 설립되었다. 가나안 농군학교에서는 정신교육, 농업기술 교육, 그리고 나아가 훌륭한 지도자가 되기 위한 덕목이나 내용을 가르치는 3단계의 교육이 실행되었으나, 1단계에 대한 요청 폭주로 2,3단계는 이론적 단계로만 남게 되었다.
그의 사상은 한마디로 “복민사상” 혹은 “복민운동”으로 압축할 수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에 기초하여 민족이 가난과 무지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복민운동을 보았던 것이다. 그의 복민사상은 근면, 봉사, 희생의 세 가지 이념에 기초하고 있다. 가장 먼저 근로는 사람이 먹고사는 가장 기본적인 생활로, 그의 노동관은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는 데살로니가 후서의 말씀을 통해 단적으로 볼 수 있다. 두 번째로 봉사는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라는 말씀을 기반으로 서로를 위해 봉사하고 섬길 때 가장 아름다운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희생은 사랑으로, 봉사보다 앞선 것이었다. 위의 세 가지 외에도 또 다른 원리는 개척 정신이었다. “억지로 못살지 말고 억지로 잘사는 사람이 되자”라는 표현과 함께 남들이 일구어 놓은 안정된 기반이 아닌 황무지를 개척하는 도전 정신과 태도를 보여주었고, 이것이 바로 개척 정신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외함으로 그는 남들이 가지 않은 개척의 길,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앞서 본 선각자, 남들이 하지 않은 것을 도전하는 실천가였다.
도전은 두려운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도전했다가 실패하고 나면 다시 일어서기를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교육의 현장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이제까지 앞서 있던 사람들이 했던 방식을 따라하거나, 처음 만들어서 잘 실행되었던 교육의 방식에 안주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도, 사회의 빠른 변화 속에서, 교육의 방식과 내용도 이전 것에 안주하지 않는 개척 정신을 가지고 변화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스승, 인물로 보는 한국 기독교 교육사상> - 주영하
대양 주영하 선생의 기독교와 인연은 아버지가 세상을 뜨면서였다. 일곱사에 아버지를 잃은 대양에게 이웃에 사는 김병수 장로가 “육신의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내가 영원히 죽지 않을 아버지를 소개할 테니 교회로 가자”는 말로 처음 교회로 인도했고, 김병수 장로를 따라 새벽마다 교회에 다니며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게 되었다. 새벽제단을 쌓는 습관은 청년기에도 유지되어 하나님과 대화하고, 약수터에서 냉수 찜질을 하게 만들었는데, 이 습관이 그를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가지게 한 원천이라고 볼 수 있다.
독립군에게 독립자금을 전달하던 김병수 장로의 영향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잃은 그해, 일본인들이 휘두르는 칼부림을 목격하게 된 일을 계기로, 대양의 마음에 인권의식과 애민 정신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리고 감리교 목사인 정춘수에게 경신학교를 다니는 중 세례를 받게 된다. 그는 시, 음악, 미술을 좋아하는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었지만, 의를 위해서는 자기 의 살과 뼈를 베는 고통과 희생마저도 감수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단천 농업학교에서 학생운동을 하다 퇴학을 당하게 된다. 그에게 영향을 미친 민족주의자 김관식 교장은 자신이 아끼는 제자가 퇴학을 당하자 그의 손을 잡고 서울로 내려와 경신학교에 편입을 시켜준다. 이 학교에서 대양은 브나로드운동에 참여하고, 뚝섬교회에서 직접 계몽운동을 벌이기도 했다.대양은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우리민족을 섬기고 올바르게 이끌 인재를 키울 결심으로 연희전문학교를 졸업과 동시에 교육계에 뛰어들게 된다. 그는 교육계뿐만 아니라 한국 M.R.A이사장에 취임하여 우리나라 전역의 대학과 사회에 복음주의, 세계주의, 실천주의 등에 이바지하는 등 민족주의적 정신으로 사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한글을 사랑하여 한글을 사용하고 널리 알리는데에도 앞섰다. 그는 한국 대학생 선교회를 설립한 유성 김준곤 목사와도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대학생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전할 수 있도록 교육했다. 그리고 대양은 세종선교회를 세웠고, 그의 아내 최옥자 목사는 한국여성크리스천클럽을 통해 예배, 문화, 신앙 훈련등을 활발하게 실시하며 병원 교도소등을 대상으로 하는 문서 선교에도 힘썼다.
일본의 억압속에서도 대양은 경성인문중등학원, 서울 여자학원등 민족주의적 성격과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하는데 힘썼고, 서울여자학원은 1948년 서울 가정보육사범학교 설립 인가를 받고 점점 성장하여 사범대학으로까지 성장하였다. 그가 캠퍼스를 꾸미고 학교를 발전시키던 중 한국 전쟁이 일어나 몇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부산에서 버스에 치어 큰 사고를 당하게 된다. 그의 아내 최박사가 의사였던 경험을 살려 그를 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심장이 멎고 말았다. 하지만 다음날 정오 즈음에 대양이 눈을 떴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 자신의 사명을 이어가야 함을 체험했다. 그 후 마산 근처에서 병원을 낸 최박사의 병원도 크게 성장했는데, 이 수입의 대부분을 학교와 학교 법인에 기부하였다. 수도 여자사범대학에서 부속 중, 고등학교를 세웠는데 여전히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이어지는 이 학교에서는 매주 채플을 실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세운 수도여자사범대학은 후일 세종대학교가 되어 “기독교 정신”, “애지정신”, “훈민 정신”으로 세운 창학 이념은 유지되고 있다. 낮은데를 보살피고, 함께 사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 대양의 교육 사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조용하고 온화했지만, 동시에 강한 추진력과 정확하고 빠른 결단력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도구로 쓰신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이었다. 교사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쓰임을 받고자 한다면, 낮은 곳으로 향하는 그의 모습을 반드시 본받아 행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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