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2. 17:44ㆍSTUDY
흔히 자본주의를 돈이 최고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고, 그 궁극적 의미가 돈이긴 하지만, 단순히 돈을 최고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돈을 생산적인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이야기 한다. 막스베버는 이 책에서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에 대한 주장을 기반으로 비판하고 보완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사유재산이라고 불리는 돈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유산자와 무산자 계층의 빈부 차이가 당연히 있는데, 유산자, 즉 자본가가 자신의 사유재산을 더 많이 늘리기 위해 빈곤한 노동자 계층을 착취하고, 노동자들은 자신의 하루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착취당하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사유재산 제도를 없애는 공산주의혁명을 주장하였다. 베버는 공산주의 아래에서도 억압과 착취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심각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자본주의의 본질적 특징인 “노동의 합리적 조직”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이는 “첫째, 일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다. 둘째, 정직하고 근면한 노동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이 인생의 최고 목표다. 셋째,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경멸하고 계획을 세워 실천하는 생활을 한다. 넷째, 일하기 위해 쾌락, 행복, 즐거움 등을 포기하고 쓸데없는 휴식과 게으름을 물리친다. 다섯째, 돈을 모으기 위해 절약하고 검소하게 생활한다. “ 와 같은 생활 방식을 자본가와 노동자가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한다.
자본주의 정신은 중세 가톨릭이 권력의 정점에서 타락하자 이에 맞서 루터가 시작한 하고 칼뱅이 발전시킨 프로테스탄트 교회로부터 시작되었다. 칼뱅의 기독교 사상에는 신의 절대 결정권을 인정하는 절대주권, 처음부터 구원과 저주를 예정해놓았다는 운명 예정, 그리고 인간은 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신의 영광 의 세 가지 교리로 나누어진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영국에서 일어난 인클로저 사건 때문에 시작되었다고 말하지만,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적 요소가 칼뱅의 교리와 관련되어있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 사회를 권력 갈등의 관점에서 보았는데, 이 권력을 위해 아랫사람이 당연히 복종하게 하는 것을 정당성이라고 하며, 당연히 복종하는 것을 권위라고 한다. 권위에는 사람들이 풀지 못하는 것을 푸는 사람을 인정하고 그에게 복종하는 카리스마적 권위, 오랜 세월동안 복종해서 자연히 복종하는 전통적 권위, 그리고 법에 입각해 복종하는 합법적 권위가 있다. 베버는 노동하는 자체를 가치 있게 여기고, 정직하고 근면한 노동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할 것이며,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경멸하며 계획을 세워 생활하는 것, 그리고 돈을 벌기위해 행복과 즐거움을 포기하고 쓸데없는 휴식과 게으름을 물리치며, 그 돈을 모으기 위해 절약하고 검소하게 생활한다는 정신을 자본주의의 기본 정신으로 세웠다. 베버의 자본주의는 생산 자본주의이기 때문에 금욕하며 생산하기를 추구했으나, 소비의 부족으로 경제가 돌아가지 않자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 정책을 펼쳤고, 현재의 소비자본주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현대 사회에서 부유한 집단을 보면 프로테스탄트 신자가 많은데, 이는 가톨릭에 비해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부유한 것은 물론 부유한 재산을 물려받은 까닭도 있으나, 가톨릭은 내세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현세에 금욕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종교적인 신념의 차이라고 본다.
미국의 정치가 프랭클린은 신용이 좋고 정직하며 자본을 증가시키는 것을 의무로 여기고 삶의 목적 자체로 삼는 사람을 이상적인 인간으로 여기며 자본주의와 비슷한 성향을 보인다. 베버는 전통주의의 문제점인 비윤리적 금전추구를 이야기 하면서, 자신의 일을 소명으로 여기는 것이 전통주의를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이야기한다. 다음으로 기업가들 속의 전통주의는 좀바르트의 인간의 경제적 동기를 욕구충족과 이익추구 동기를 통해 볼 수 있는다. 이 중 살기 위해 일하는 욕구 충족 동기에 따라 운영되는 경제는 전통주의와 같은 개념이고, 일하기 위해 사는 이익추구 동기는 자본주의와 같은 개념이다.
베버가 앞서 언급한 소명은 루터가 이야기한 개념으로, 직업 노동을 이웃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며 신의 부르심으로 보고, 가톨릭의 이중 도덕을 비판하였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 추구하는 이자와 이익을 추구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뮌처에 의해 반란 세력이 세워진 루터는 그들을 비판하며 신분과 직업은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 하였는데, 그에 대한 뒷받침으로 누구나 구원을 받을 수 있으니 신분과 직업은 무의미 하다는 것이었고, 주어진 상황은 신이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고 주어진 것은 신의 뜻이니 거스르지 말라는 섭리 사상이었다. 이로 인해 루터의 직업 소명 사상은 약해졌으나 칼뱅을 비롯한 그의 후계자들은 이러한 사상을 더 강화시켰다.
베버가 이야기하는 종교의 구원에 이른 상태에는 현세적, 내세적, 금욕주의, 신비주의 가 있는데, 이중 현세적 금욕주의가 자본주의와 가장 가까운 종교의 모습이며, 그의 대표적인 형태가 바로 칼뱅주의이다. 칼뱅은 신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며 인간의 구원은 예정론에 의해 신의 임의대로 결정된다고 한다. 이 예정론은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선한 일을 해야 하고, 선한 일에 성공한다면 구원을 받은 증거가 되고, 그래서 인간을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적극적인 사람으로 만들게 된다. 가톨릭에서 주장하던 모든 종교적인 활동들과 더불어 신조차도 구원을 위해 아무 의미가 없어지자, 청교도들은 탈주술화 하여 종교의식을 없애고 인간의 감정적인 요소를 억제하였다. 이런 주장 아래에서 서로 다른 운명을 가졌다고 생각하여 부모 자식의 삶도 정확하게 구분이 되어있다. 구원은 결국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전통적인 조직처럼 실력보다 관계나 인정, 신분과 같은 요소들을 생각하기보다 신의 영광을 증대 시킬 수 있는 능력을 중요시 하였고, 합리적인 규칙아래에 모두가 평등한 반 권위적 태도를 가지고 민주주의의 기반을 놓게 되었다.
영국의 청교도 신학자인 백스터의 의견에 따르면 직업 노동은 금욕적인 수단이 되고, 신의 뜻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일을 하지 않으면 먹지 않아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앞서 논한 루터의 직업 소명론과 일치하는데, 그저 숙명이기에 받아들이라는 루터와는 달리 칼뱅은 자신의 능력에 맞는 직업을 선택하여 그를 통해 신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백스터가 가장 중요시보는 직업의 유용성은 개인에게 이익이 되는 정도인데, 이는 청교도들이 자신의 이익의 기회를 이용하는 것이 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보았다. 자신들은 신에 의해 선택 되었기에, 물질은 신의 축복이라 생각했고, 따라서 물질과 돈은 더 이상 죄악시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필요이상의 목적으로 들기는 향락은 신앙의 적으로 간주되어 칼뱅주의의 혐오를 샀다. 청교도들은 중세 빈민들의 구걸을 금지하는 구빈법을 만들고, 자본주의 사상을 통해 노동자들은 적극적인 노동을, 고용주들은 기업 경영을 소명으로 여기도록 만들었으며, 그 결과 노동 생산성이 크게 증가하였다. 개인의 능력과 창의력을 발휘하여 합법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도록 하였다. 현재 자본주의 경제질서는 쇠 우리가 되어 사람들을 물질적인 삶속에 가두어 기계같이 일하게 만들었고, 소명감은 죽고 말았다. 물론 자본주의의 전반적인 이야기가 종교정신을 기반으로 이루어졌지만, 사회는 정치적 경제적인 요소도 중요하다.
19세기부터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보헤미안들이 일어나 낭만주의를 일으켰고, 보헤미안들과 부르주아 사이에서 내내 전쟁이 있었으나, 현대 사회는 큰 성공을 거두었어도 사회적 평등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으려 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면서도 과소비는 피하는, 자본주의와 낭만주의의 장점만을 가지고 있는 “보보스”의 사회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금융자본주의처럼 돈놀이를 하지 않고, 너무 쓰기만 하는 소비자본주의와도 다르게 건강한 직업 노동 정신을 가지고 올바른 자본주의 정신 만들기에 성공하기를 기대한다.
처음 책 제목을 봤을 때 상당히 어려워서 이해하기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예상대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기는 했지만 만화로 되어있고 딱딱하지 않은 흐름덕분에 내용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내가 자본주의와 전통주의 사이에 걸쳐있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전통주의에 많이 가까운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책 71쪽에 나와 있는 “돈을 벌고 또 벌어라, 삶의 모든 즐거움을 완전히 포기해라. 행복과 쾌락을 추구하는 마음을 다 벗어 던져버려라”하는 프랭클린의 말을 읽었을 때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책을 다 읽은 지금에도 이 말은 이해할 수가 없다. 평소 내가 생각했던 삶의 가치는 행복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기 위해서 살아간다고 말하고 있는데, 쾌락은 그렇다 해도 행복을 추구하는 마음을 다 벗어 던지라는 것은 삶을 살아갈 때 기계처럼 살아가라는 의미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돈을 벌고 또 벌기 위해 삶의 모든 즐거움을 완전히 포기하고 행복마저 포기하게 된다면 삶의 의미가 사라질 것 같다. 자본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이라기보다는 프랭클린의 의견이 너무 극단적인 것 같다는 의견이다.
물론 책 말미에 나왔던 것처럼 건강한 직업 노동정신을 가지고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은 옳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성장하고 경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각 사람들이 맡은바 자신의 직업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이 맞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물건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열심히 생산하면, 상인들은 열심히 판매를 하고, 사업가들은 그 물건들을 수출하고 또 필요한 것은 수입하면서, 더불어 소비자들이 그 생산과 판매의 움직임에 맞추어 소비할 때 경제가 움직이기 때문이다.
사실 자본주의라고 하면 돈을 떠올렸던 것이 사실이다. 돈이 중심이 되고 부를 쌓는 것이 자본주의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부끄럽지만 자본주의를 비판적으로 보고 돈이 가장 우선시 되는 돈벌레들이 만들어낸 독한 사상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책을 읽고 자본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면서 기본적으로 자본주의가 무조건 적으로 돈을 중심으로 보고 부를 쌓는 것을 최고로 보는 것이 아니라, 더 잘살기 위해서 올바른 방법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가장 최선을 다해서 부를 쌓는 그 과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의 서두에서 한국의 천민자본주의에 대해서 꼬집었을 때에는 조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작정 부를 쌓으려고 한다는 천민자본주의의 모습이 정말 바로 한국 사회의 경제를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신학생인 나조차도 아직 세상에서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그저 돈이 많은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어떻게 하면 나도 좀 누리고 살아볼 수 있을까 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고,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어보고, 대접을 받아보려고 정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에만 눈이 먼 모습을 많이 보았고, 특히 물질에 눈이 멀어 범죄에 연루된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더 많이 부끄러웠다. 그리스도인으로써도 세상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이 부끄러웠는데, 사회적으로도 비판을 받고 있는 모습이라는 생각에 참 부끄러웠다. 베니스의 상인에서 그렇게 욕하던 샤일록의 모습이 현재 우리 대한민국 사회의 모습이 아닐까 하고 머릿속에 그려졌기 때문임도 있다. 자본주의를 왜곡하여서 너무 돈을 밝히는 모습을 가져서는 안 되겠지만, 위와 같은 모습을 고쳐 자본주의의 올바른 모습대로 공정한 방법으로 열심히 부를 축척하게 된다면 사회적으로도 비판을 받지 않고, 비신앙인들에게 비춰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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